삼성전자를 생각한다.

하버드의 유명한 경제사학자인 알프레드 챈들러의 책 중에 "Scale and Scope"라는 책이 있습니다. 
19세기말~20세기초 시기에 미국/영국/독일을 중심으로 거대 글로벌 기업의 탄생과정을 추적한 책입니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저자가 갖고 있는 지식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 경탄하게 되는 책이죠.

Scale and Scope
카테고리 인문/사회 > 역사 > 일반
지은이 Chandler, Alfred D. (Harvard,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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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하고 심오한 책입니다만, 간단하게 책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금융자본 발달에 따른 기업의 인수합병, 그에 따른 지배구조의 변화와 전문경영인 체제의 도입이 기업의 거대화를 가져오고 규모의 경제, 범위의 경제가 발생하면서 궁극적으로 탁월한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기업이 탄생하게 되었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요즘의 삼성전자를 보면, 이 "Scale and Scope"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로벌 거대 기업 삼성전자의 사업부는 TV,핸드폰 등을 만드는 세트 사업과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을 만드는 부품 사업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메모리 반도체 시황이 좋을 때에는 부품사업이 전체이익의 2/3을 책임지고 나머지 1/3이 세트 사업에서 이익이 나오게 되지요. 

삼성전자가 영위하고 있는 세트와 부품은 모두 경쟁이 극히 치열한 시장입니다. 또 거의 모든 사업부문의 경쟁자들이 삼성전자와 견줄만한 글로벌 기업들이죠. 삼성전자는 이들 경쟁자들을 역사, 규모 등 그 어떤 측면에서도 압도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특허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기업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천기술 측면에서도 경쟁업체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렵죠. 반도체나 LCD에서는 삼성이 최고라고 말하긴 하지만, 삼성의 강점은 양산기술에 그칩니다. 누군가 막대한 돈을 들여 일본과 유럽에서 장비를 사오고 시행착오를 거치면 삼성전자가 내세우는 초미세 공정으로 반도체를 만들 수 있고, 초대형 기판에서 LCD를 생산해낼 수 있죠. 실제로 대만업체들이 그러고 있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시장을 주도합니다. 압도한다라는 쪽이 정확하죠. 지금은 다소 퇴색됐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DRAM시장에는 'Golden Price'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모든 DRAM생산업체 중에서 삼성전자만 이익을 낼 수 있고 다른 업체들은 모두 적자를 보는 가격대를 말하는 개념입니다. 삼성전자는 시장 공급량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가격이 골든 프라이스에 머물수 있게 해서 경쟁자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혀 왔습니다. 

확고한 기술적 리더쉽을 가진 것도 아니고, 방대한 내수시장을 가진 것도 아닌 삼성전자가 어떻게 주요 사업분야에서 모두 시장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을까요. 인정하기 싫은 분도 있겠지만, 경영진의 뛰어난 투자의사결정이 그 비결이었습니다..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남보다 한 템포 빨리 대규모 투자를 집행해서 삼성전자는 지속적으로 캐파(생산능력)의 우위를 점해왔습니다. 제품차별화가 어려운 부품시장에서는 싸게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게 최고죠. 이런 방식으로 삼성은 DRAM, LCD, 하드디스크, 플래시메모리 그리고 최근에는 LED까지 손대는 부품 사업에서 전부 세계에서 가장 큰 생산능력을 가진 회사가 되었습니다. 절묘한 타이밍과 과감함으로 규모의 경제를 가진거죠. 

규모의 경제를 통해 부품을 싸게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은 삼성전자 그스로에게도 기회가 됩니다. 
똑같은 완성품(세트)를 만들어도 남보다 더 많은 마진을 남길 수 있죠. 비용을 절약해 확보한 두꺼운 마진은 마케팅 투자로 연결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LCD공급자가 된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TV시장을 장악했고 그 다음에는 핸드폰으로.....부품 사업의 규모 경제가 세트의 경쟁력이 된 것입니다.

세트 부문에서 글로벌 영업망과 브랜드 인지도를 갖추게 되자 이제는 범위의 경제가 생깁니다. 
삼성이 가진 '범위'의 무서움이 극명하게 드러난게 LED입니다. LED제조는 사실 그닥 어려운 기술이 아니죠. 양산된지 30년이 넘은 소재입니다. 수요처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다들 투자를 꺼렸고 그렇다보니 LED가격은 비싸고..비싸니까 수요가 없고 악순환에 빠져있는 소재였죠. 
삼성이 TV 경쟁력 강화를 위해 LED TV를 출시하기로 결정하면서 부족한 LED공급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계열사를 통해 LED생산 라인에 투자를 했습니다. TV를 통해서 LED를 일정부분 소모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었다면 아직까지 수요가 창출되지 않은 LED에 그렇게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없었겠죠. TV에서 세계 1등이었기 때문에 LED에 대해서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수 있게 된 겁니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는 LED를 세계에서 가장 싸게 공급받는 TV제조업체가 되었고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LED TV라는 새로운 시장을 엽니다. 경쟁업체들이 삼성의 성공을 보고 앞다투어 LED TV를 출시하면서 세계적으로 LED수요가 확대되자 이번에는 반대로 LED사업 자체가 큰 수익을 얻게 됩니다. 어느 한 분야의 장점이 다른 분야로 전이되는 겁니다. 

디램 업황에 따라 삼성전자가 주가가 출렁이던 2~3년전의 삼성전자가 '규모의 경제'만을 가진 기업이었다면, 최근의 삼성전는 완연히 '규모와 범위'를 모두 가진 기업이 되었습니다. 단적으로 삼성과 애플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애플은 삼성전자 플래시 메모리의 최대 고객입니다. 삼성은 이 거래관계에 핸드폰용 메인프로세서를 끼워 팔고 있습니다. 메인프로세서와 같은 비메모리 반도체 쪽에서는 삼성이 경쟁우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플래시 메모리를 파격적인 가격으로 공급하는 조건으로 비메모리 반도체 수요처를 확보한 거죠. 규모의 경제로 확보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범위를 넓히는 것입니다. 애플은 싼 값에 플래시 메모리와 메인프로세서를 사오는 조건으고 삼성에 메인프로세서 설계기술을 일부 공유합니다. 이렇게 확보한 설계기술과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자사의 핸드폰에 사용될 메인프로세서를 자체생산합니다. 애플 아이폰과 동일한 프로세서를 가진 갤러시S가 탄생하게 되고 아이폰과 자웅을 겨루게 되죠. 범위의 경제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과거, 삼성전자가 너무나 좋아보이던 시점은 항상 삼성전자 주가의 정점이었습니다. 많은 투자자들이 삼성전자 호실적을 믿고 투자했다가 변변찮은 수익률을 올렸죠. 당시의 삼성전자 실적은 디램/LCD 업황에 의해 결정됐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좋았을때는 늘 반도체/디스플레이 업황이 좋았던 시점이었고, 이렇게 좋은 업황이 역설적으로 경쟁자들의 투자욕구를 자극해 공급과잉으로 이어져 삼성전자 실적이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삼성전자가 다시 또 너무나 좋은 실적을 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양쪽 모두 업황이 좋습니다. 향후 전망이 불안한 것도 똑같습니다. 지금 일본과 대만의 경쟁업체들은 한창 생산량을 늘리고 있고 하반기 들어 디램과 디스플레이 모두 공급량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하이닉스에 대해서는 외국계 증권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매도" 리포트를 낸 것도 같은 논리입니다.

하지만 요즘의 삼성전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고민이 됩니다. 삼성전자의 Scale에 Scope까지 추가된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죠. 이번에는 지난번 사이클과 다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범위의 경제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규모와 범위가 시너지를 창출하지만 반대로 역시너지 효과를 낼 때도 있습니다. 

애플은 반도체 사업의 최대 고객이지만 핸드폰 시장에서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합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고객과 경쟁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죠. 소니 역시 TV에서 삼성과 라이벌입니다만 부품에서는 삼성과 합작투자한 S-LCD에서 패널을 받아가고 있죠. 

지난주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4의 안테나 문제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면서 삼성 옴니아2를 비롯해 다른 경쟁업체의 스마트폰들을 같이 비교했는데요, 당연히 RIM이나 HTC는 애플 성능비교에 대해서 반박 성명을 냈습니다. 금요일에 애플이 기자회견을 하고 주말 이틀 동안 RIM과 HTC가 반박성명을 내는 동안 삼성은 가만히 있길래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대 고객인 애플과 맞서봐야 좋을 것이 없고, 어차피 다른 업체들이 알아서 반박해주고 있으니 묻어가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결국엔 월요일 아침에 외신에서 삼성의 반박성명도 나오더군요. 어쨌거나 작은 일이긴 합니다만 분명히 세트와 부품을 동시에 영위하는 사업자로서 이해관계 충돌의 문제가 있는 거죠. 

반도체/디스플레이 호황이 2010년 2분기가 정점이라는 것이 거의 명약관화시 되는 상황에서 삼성의 미래는 부품과 세트 사업의 이해관계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는냐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고객과 경쟁하면서도 고객이 도저히 떠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성공이 있었는데, 향후 반도체/디스플레이/LED/배터리 등에서 모두 공급이 확대되는 국면이 온다면 이런 경쟁우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챈들러의 'Scale and Scope'에 등장하는 100년전의 글로벌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간에 발생하는 충돌이 적었습니다. 100년전의 '범위'개념은 제품 라인업 보다는 시장 확장이었거든요. 미국기업이 유럽시장에 진출하고, 해외 기업을 M&A하는게 범위의 확대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장은 이미 글로벌화돼있고 경쟁업체간 M&A라는 것도 쉽지 않죠. 

규모와 범위를 모두 확보한 100년전의 기업들은 대부분 산업을 지배하는 전통적인 강자가되었습니다. 최근들어 GM이 망할 뻔 하긴 했지만 미국의 자동차 회사나 소비재 기업들은 글로벌 1위로 100년을 갔죠. 이제 이머징마켓에서 100년가는 글로벌 기업이 나올 수 있느냐 없느냐를 증명하는 역할은, 현재로서는 중국의 화웨이나 비야디가 아닌 삼성전자의 몫입니다

쉽지는 않아보입니다. 하지만 삼성이 그동안 쉬운 숙제를 해온 회사는 아닙니다. 삼성 일가가 사회적인 지탄을 많이 받기는 해도, 앞서 쓴 것처럼 지난 20난 꾸준히 적절한 투자의사결정을 해왔거든요.

결론은.. 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로 마무리해야 될 것 같네요. 1~2년 뒤 삼성전자의 모습이 많이 궁금합니다. 


(P.S. 주식투자 관점에서는, 삼성전자의 모든 장점이 이미 만개하고 있는 지금 시점이 투자의 호기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투자란 원래 어두울 때 시작해서 밝을 때 마무리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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