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찬, 투기적인 시장

GMO의 제레미 그랜덤이 Summer Essay를 공개했다.  에세이는 총 6개 주제로 구성돼 있는데 3번째 에세이인 'The Fearful, Speculative Market'은 작금의 세계 자본시장의 상황을 요약하는 명쾌한 글이기에 해당되는 부분을 요약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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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1분기에 시장에 대한 3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경기회복이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데 30%, 경기 상황이 악화되지만 FED의 확장정책에 따라 단기 조정 후 과도한 상승세를 보이는데 50%, 일련의 악재가 동반되며 대세하락 국면으로 가는데 20%의 확률을 부여했다. 

3개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50%의 두번째 시나리오와 20%의 세번째 시나리오가 현실에서 치열하게 경합하는 상황을 보고 있다. 이 경합은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시장참여자들이 두려움에 차있으면서도 한편으로 투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모순되는 시장이다. 지속되는 저금리가 투자자드의 공격적인 투자행태를 자극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주식투자 전반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하고 마이너스 실질금리에도 불구하고 현금을 보유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주식시장에 대해서 좀 아는 사람이라는 스몰캡(시가총액이 작은) 주식의 베타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체 주식시장이 하락 국면으로 가면 스몰캡 주식의 움직임은 상대적인 벨류에이션 상황에 따라서 조금 다르게 움직인다. 스몰캡주식의 벨류에이션이 시장과 비슷할 때 스몰캡의 베타는 1.2이다(전체 시장에 비해 20% 더 많이 빠진다는 말). 스몰캡이 고평가돼있을 때에 베타는 2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반대로 저평가돼있을때에는 상대적으로 방어적인 모습을 보인다. 

2009년의 급등장에서 투기심리는 극도에 달했고 스몰캡 주식의 수익률은 좋았고 그 결과로 올해 연초에 스몰캡 주식의 벨류에이션은 상대적으로 고평가 상태였다. 올해 상반기가 하락장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스몰캡은 시장 대비 훨씬 더 많이 빠져었야 했다. 실제로 1981년 이후 스몰캡이 고평가 상태에서 시작된 하락장을 조사해보면, 스몰캡이 아웃퍼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올해 지난 30년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이같은 이상한 움직인 미국 밖에서도 일어났다. 유럽 위기 이후 경기침체 대한 우려가 확산되었지만 이런 우려가 스몰캡 주식에까지는 미치지 못했고, 스몰캡 시장에서는 오히려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에서 비롯된 투기적 심리가 우세했다. 미국에서는 이런 시장 분리 현상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서, 대형 블루칩이 정체를 보이는 동안 스몰캡 뿐만 아니라 대형주 중에서도 투기적인 low-quality 주식(상대적으로 재무구조가 취약하고 이익 예측이 어려운 기업)들의 상대적 고평가가 지속됐다. 

우려와 투기와 공존하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풀려나갈까. 경기회복 둔화와 시장참여자들의 두려움 확대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투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나느 새삼 저금리와 그린스퍼니즘(FED의 경기확장 우선 기조)의 힘을 느꼈다. 지난 분기보다 경기 전망이 더 안좋아지긴 했지만 나는 단기 하락장 후 다시 자본시장이 전체적으로 과열양상을 보일 거라는데 여전히 45%의 확률을 부여한다. 악재가 반복되면 하락세를 이어갈 확률은 30%로 좀 더 높아졌다. 

만약 시장이 계속 하락한다면 Low-quality 주식과 스몰캡에 대한 현재의 시장의 선호가 순식간에 바뀌어버릴 수 있다. 대형 블루칩의 기대 수익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시장 참여자들이 좀더 보수적이 된다면 High quality주식이 아웃퍼폼할 것이다. 

High quality(우수한 재무구조, 안정적 사업기반을 가진 기업) 주식은 1932년 이래 가장 투기적인 시장이었던 작년 시장에서 소외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자동차, 화학, 반도체/디스플레이와 같은 경기민감 업종이 시장을 주도하고 이익안정성이 높은 내수/유틸리티/통신 기업들는 지속적으로 저평가됐었다.) 올해에도 '좋은 주식'들의 저평가는 회복되지 못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는 것을 단지 저금리 때문이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 시장의 가격결정 기능이 왜곡될 때에는 항상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이성적인 이유가 아닐지라도 항상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나도 정확히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2가지 배경이 있는 듯 하다. 

먼저 인구구조상 은퇴자의 증가이다. 근로자가 은퇴하게 되면 포트폴리오상 갖고 있는 주식을 팔게된다. (미국의 퇴직자산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퇴직자산은 보통 보수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블루칩 포트폴리오로 구성돼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퇴직자 증가에 따른 블루칩 매도 우위 현상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요인으로는 기관투자자들의 "예일대학처럼 하기" 신드롬이다. (예일대는 적극적인 대안투자 확대로 높은 기금 운용수익률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기관투자자들은 최근 헤지펀드와 PEF에 대한 투자 비중을 늘렸다. 헤지펀드나 PEF가 코카콜라나 전통적인 미국 블루칩 주식들을 거래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역시 블루칩에 대한 수급공백이 생긴다. 

합리적인 시장에서도, 기업가치와 관련없는 수급공백은 장기간의 비상식적인 가격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군중심리가 지배하고 그린스펀과 버냉키와 같은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중책을 맡고 있는 미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하다. 

수급공백은 가격 결정에 있어 파워풀한 요소이긴 하지만, 이러한 비이성적인 이유가 존속되는 것은 탁구공을 물 속에 가라앉히는 것고 같다. 내리는 누르는 압력이 없어지면 금새 수면 밖으로 튀어오를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블루칩 주식들이 일시에 재평가되는 시기가 올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난 20년간 미국 시장이 보여준 모습과 정반대되는 모습이다. 미국 시장의 블루칩은 대체로 늘 고평가돼있었고  일시적인 이벤트에 의해서 간간히 적정가치로 떨어졌었다. 이제는 저평가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일시적으로 재평가되면서 가격이 오르는 반대되는 현상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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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경기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경기에 대한 전망과 시중에 풀려있는 유동성이다. 
그랜덤의 말처럼, 현재 시장은 경기에 대한 안좋은 전망과 풍부한 유동성이 묘하게 겹쳐있는 상황이다. 
요새 사람들을 만나보면 유럽 은행의 재무제표 한 번 안들여다 봤을 비전문가들도, "유럽이 힘들것 같다"라는 말을 한다. (전문가는 물론이고 말이다.) 하지만, 경기가 불안하면 불안할 수록 정책입안자들은 유동성을 통제하는데 불안감을 느낀다.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말그대로 '헬기타고 공중에서 뿌린' 수많은 돈들이 경제 내에서 과잉 유동성 상태로 잠재돼있지만 지금 이를 거둔다는 것은 (쉽게 말해 출구전략을 시행한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다. 최근에 국토부에서 DTI 상향을 거론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려움과 유동성의 결합 속에서 한국 주식시장도 철저하게 투기적이다. 이익 꾸준히 잘 내고 벨류에이션 싸지만, 뚜렷한 성장성이나 주가 상승 촉매가 없는 주식들은 그랜덤 말처럼 몇년째 버려져 있다. 삼성전자, 현대차, KT, 대형금융주와 같은 시총 상위 업종 대표주에게도 가혹한 벨류에이션이 부여된다. 펀드 환매도 몇 개월째 지속되는 것도 미국과 똑같다. 그렇지만 시장 자체는 역시 뜨거운 편이다. LED와 2차전지 그리고 중국 내수 관련업종(현재로선 석유화학) 3각 편대의 상승동력은 어마어마하다. 요새 흔히들 얘기하는 속칭 '자문사 7공주'들도 대부분이 이 3각 편대에 속한 종목들이다. PER기준 20~30배의 벨류에이션까지 올라왔는데도 여전히 '잘 가고' 있다. 

시장 전반은 방향성 상실하고 박스권에 갖혀있고, 일부 투기적 주도주로만 수요가 몰리는 현 상황.. 어떻게 풀릴까. 

연초까지만 하더래도, 그랜덤이 했다는 예측대로 단기적인 조정 이후 작년 중반이나 연초에 보였던 시장의 상승흐름이 지속될 가능성은 높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유럽의 국가간 이해관계, 정부와 유권자간의 이해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했고 일련의 정책지연과 불협화음이 발생하면서 세계 경제의 회복에 찬물을 끼얹었다. 요즘은 여기에 중국 부동산 문제가 더해져 일이 아주 복잡해졌다. 

향후 경기와 자본시장이 어떤 흐름을 보일지는 이제 경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경제상황은 더블딥과 인플레이션 둘 중 하나의 극단적 선택을 요구하는 국면이다. 세계 여러나라의 정부가 통화팽창/규제완화로 가면 인플레이션과 자산가격 버블로 가는 것이고, 반대로 구조조정을 우선시해서 잉여통화흡수/규제강화로 가면 더블딥이나 더블딥에 준하는 충격이 올 것이다. 모든 정부가 다 중간으로 가고 싶겠지만, 유럽이 터지고 중국부동산 부각되고 나서는 중간으로 가는 건 영 힘들어 보인다. (1)각국 정부가 지연된 구조조정을 수행하는데 따르는 정치적 부담을 감수할 수 있는 지도자를 가졌느냐, (2)자유주의와 진보노선 사이의 갈등이 어떤 쪽의 우세로 끝나느냐, (3)정부간 공조를 저해하는 노이즈가 어디서 나오느냐에 따라서 양 갈래길의 선택이 이뤄지게 될 것이다. 미국의 실업률 따위를 볼 게 아니라 정치 뉴스플로우를 따라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향후 전개될 흐름이 극단적인 양 갈래길에 있다는 것이다. 방향성없이 투기만 난무하는 지금 시장의 모습이 앞으로 1년, 2년 계속될 수 있을까? 그랜덤 표현대로 탁구공을 물속으로 누르는 일인데 무한정 이런 상황이 지속되리라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Fearful, but speculative'는 길어봐야 앞으로 몇 개월 정도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뉴스플로우 따라가면서 롱숏을 자유자대로 구사할 수 있는 투자자가 아니라면, 현재로서는 주식투자의 기대수익률을 낮게 잡고 벨류에이션 플레이를 하는게 맞을 것 같다. 시한부의 '주도주'를 추격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고, 벨류에이션 싼 종목들은 이미 완전히 버려진 상황이기 때문에 유동성없는 주식만 주의하면 가격이 많이 빠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번 사이클을 안전하게 넘기고 다름 사이클에서 큰 기회를 노린다는 마인드로 합리적 투자를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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