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제의 공리주의적 결론은 편협한 이기주의의 교묘한 타협일 수 있다.

세상사에 절대적으로 옳은 일은 거의 없다. 무엇이 옳은지 불투명한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을 하는데 있어 가장 널리 사용되는 잣대 중 하나는 '무엇이 더 사회 전체적으로 이득이 되냐'는 공리주의적 접근이다. 학창시절 <윤리> 교과서에서 배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말이다.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다른 잣대들도 많이 있지만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의 행복 총량을 늘린다는 점에서 가장 알기도 쉽고 가장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리주의적 접근은 (특히 사회적인 문제 해결에 있어서) 항상 위험하다. 전체 행복의 총량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 각 구성원 간의 배분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적 의사결정 하에서는 누군가 손해보는 사람이 발생하더라도 총합 측면에서 '사회 전체의 부가 증대되었으니 참아라. 여기서 니 몫을 부르짓는 건 이기적인것이다'라는, 언뜻들으면 굉장히 합리적인, 하지만 굉장히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이야기를 마구 던질 수 있다. 

이런 공리주의적 접근 방법은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면서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는 손쉽고 강력한 도구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덧셈과 뺄셈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100을 얻고 누군가는 80을 잃었지만 합치면 +20이니 사회가 나아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의 행복은 사칙연산의 대상도 총량화의 대상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건전한 사회라면 반드시 공리주의에 대한 맹신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배척해야만 한다. 

대형 할인점에 대한 규제, 최저 임금 향상, 자영업자 지원, 무상급식... 뭐 논란이 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경제적 효율성', '국가 경제의 발전'을 운운하는 헛소리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수긍해 버린다. 사회의 발전은 도전과 혁신에서 오는 것이지 자본의 효율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이윤을 따져서 뭐가 더 많은 '돈'이 되느냐에 따라서 사회적 문제에 접근하면 세상의 양극화는 늘 '총량'의 관점에서 정당화되고 가속화되어 일반의 삶은 더욱더 비참해질 뿐이다. 한 명의 행복이 백 명의 불행을 정당화할리가 있겠는가. 중요한 건 뭐가 더 돈이 되냐가 아니라 뭐가 더 인간으로서 옳으냐이다. 

재래시장은 절대로 대형 마트보다 생필품을 싸게 공급할 수 없다. 대형마트로 전체 사회에 생필품을 싸게 공급해서 후생이 증가한다면 공리주의 관점에서 재래시장은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다. 실제로 대형마트를 규제하면 물가가 올라간다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대형마트 규제가 과연 물가 상승의 마이너스 효과와 고용증대의 플러스 효과 중 무엇이 더 큰가의 문제일까. 모든 걸 이익과 손해, 경제적 문제로 바라보는 이런 식의 접근 자체가 조작되고 유도된 것이다. 대부분의 규제에 있어서 핵심은 뭐가 더 경제적으로 좋냐가 아니라, 기회 균등의 문제이고 분배의 문제이다. 수많은 다른 사회적 문제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는지 철학을 갖고 바라봐야 할 것들이 많은데 이 사회는 '경제적 이윤' 하나의 잣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한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으로는 세상이 점점 더 슬퍼질 수 밖에 없다. 슬픔의 대가 마저 경제적으로 판단하려는가? 그러기엔 너무 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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