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from Christina Romer)

금융위기 직후인 2009-2010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 중 한 명이었고 불황에 대한 연구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버클리 경제학교수 크리스티나 로머(Christina Romer)가 지난 10월 25일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금융위기의 발생과 극복과정에서 얻은 정책적 함의에 대한 강의를 했다. (원문링크

금융위기 이후 서브프라임모기지, 양적완화 같은 생소한 용어들이 일상화되었지만, 그간의 경제상황이나 정책대응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는 생각보다 드물다. 지난 7년간 미국 경제학계의 연구주제는 '신용위기', '경기부양' 2가지 화두에 집중되었고, 유의미한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도외시되었던 거시경제학과 케인지언이 부활했으며, 2009년 이후 글로벌 경제를 대상으로 진행된 거대한 정책실험 덕분에 가상으로만 존재했던 극단적인 통화정책, 재정정책에 대한 실증데이터들도 확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성과에 비해 일반의 인식수준은 금융위기 이전에 비해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특히, 정치인들은 경제학자들의 방대한 실증 연구들에 전혀 관심이 없고, 전문가들도 아직 전통적 통화주의 시각에 갖혀 최근의 연구결과들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마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나간 위기로부터 배움을 얻지 못하는 것이 대중사회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로머 교수의 이번 강연 내용은 정말 문자 그대로 Precious하다.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쉬운 표현들로 핵심을 관통하는 간결한 설명을 해주고 있고, 지난 5년간 벌어진 실험과 그로부터 얻은 함의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원문을 읽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우리말로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괄호 안에 있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에 없는 내용을 쓴 것이다. 



LESSON #1. 경제위기의 파괴력

2008년은 다수의 금융기관이 동시에 위기상태로 들어가면서 치명적인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경제위기는 한번 발생되면 파괴적인 악순환을 멈추기 대단히 어렵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위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비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금융기관에 대한 자본 규제 강화는 정당하며, 글로벌 대형 금융기관에는 더 높은 수준의 자본 규제가 가해져야 한다. 

그린스펀은 자신의 오랜 재임기간 동안 중앙은행이 자산시장의 버블에 개입해선 안된다는 일종의 독트린을 만들었다. 대신, 그린스펀 시대의 중앙은행은 버블 붕괴된 이후에 시장에 집중적으로 개입했다. 자산버블이 경제위기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사후약방문식의 수동적 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버블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이것이 중앙은행이 반드시 버블의 해결사로 나서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처럼 자산시장의 버블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LESSON #2. 제로금리의 교착상태

명목금리는 0이하로 내려갈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수준 이하로 정책금리를 내리게 되면, 정책대안이 사라지는 교착상태에 빠질 수 있다. 

영미권 경제학자들은 일본은행이 1996년 금리를 내렸을 때 유동성의 함정을 경고하며 일본을 비웃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도 유럽도 일본과 비슷한 함정에 빠져버렸다. 일본의 제로금리 정책이 가진 위험성을 경고한 적 있는 버냉키는 더 이상 금리를 내릴 수 없는 제로금리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적완화라는 非전통적 통화정책을 시행했다. 양적완화가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로금리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명목 이자율이라는 것은 기대인플레이션과 실질금리의 합이다. 금리를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제로금리 상태에서 가능한 대응방법 중 하나는 인플레이션 기대감을 높이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전까지 중앙은행의 책무는 "인플레이션 파이터(물가안정이 우선되는 중앙은행의 역할)"였다. 하지만 최근 요구되는 대안은 과거와 반대로 중앙은행이 일정 수준의 인플레이션를 용인해서, 경제내의 인플레이션 기대감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실질금리를 하락시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논리적이긴 하지만 또다른 문제를 양산할 수 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심리 자극해 실질금리를 내리는 정책은 반쪽짜리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 허용 이외에 가장 명백한 대응방법은 '재정정책'이다. 이자율을 내리는 것으로 소비를 진작시킬 수 없다면 한시적으로 세금을 낮추고 정부 지출을 늘리는 것으로 대응해야 한다. 거의 모든 실증연구 결과에서 재정정책이 소비진작에 효과가 있음이 입증됐다. 하지만, 나는 (최근 민주당-공화당 간의 싸움에서 보듯이) 정치적으로 시기적절한 재정정책의 시행이 얼마나 어려운지 목도했다. 

내가 균형재정의 옹호론자임을 생각할때 적자를 유발하는 재정확대에 대한 내 주장에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황기에 적자를 확대하고, 호황기에 흑자를 내서 부채를 축소하는 "경기 역방향의 재정정책"이 경제상황에 맞춰서 자동적으로 시행되도록 제도화하면 균형재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기를 안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LESSON #3. 사회의 기대심리를 컨트롤하는 것은 어렵다.

통화정책의 중요한 요소는 기대심리를 컨트롤하는 것이다. 심리를 컨트롤 하는 첫번째 방법은 (최근 연준이나 ECB/영란은행이 하는 것처럼) 미래의 금리정책에 대한 지침을 주는 것이다.(현재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실업률이 회복되지 않는한 절대로 금리를 내리지 않겠다라는 식의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를 제공하고 있다) 

두번째 방법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높이는 것이고 마지막 세번째 방법은 경제성장 기대감을 높이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자들과 정책당국자들은 기대심리를 컨트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깨달았다. 지난 6월 "테이퍼링" 이슈로 자본시장에 난리가 난 것이 그 어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버냉키의 의도와 달리 자본시장의 반응은 격렬했고, 9월 테이퍼링 연기 이후 시장은 정상화되었으나 장기금리는 여전히 이전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심리 컨트롤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너무 어렵다면 어떤 정책을 써야 할까? 1930년대로 돌아가보자.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취임 직후 금본위제를 중지하고 통화공급을 연간 10%씩 증가시켰다. 당시로서는 통화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조치로 시장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바뀌기 시작했고 실질 금리는 마이너스로 전환됐으며 이는 실질적인 소비진작과 투자확대로 연결되었다. 

루즈벨트의 성공이 주는 교훈은 기대심리를 바꾸기 위해 "패러다임 전환"에 가까운 화끈한 정책이 나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소극적인 정책은 시장에서 무시되거나 오해를 살 수 있다. 지난 20년간 효과가 없었던 일본의 경기부양책이 아베 이후 효과를 얻고 있는 것에서도 "패러다임 전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급진적인 정책으로 마침내 일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지난 두 분기 연속 4%대의 GDP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아베의 정책이 지속적인 효과를 낼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겠지만 나는 일본이 올바른 방향으로 의미있는 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한다. 연준도 좀더 과감한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LESSON #4. 통화정책은 재정적자에 대한 유효한 대응책이다. 

유럽은 물론, 미국, 일본을 포함하는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현재 재정적자문제 해결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다. 재정을 건전화하는 방법은 증세와 긴축이지만 이는 매우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은 긴축의 대가로 엄청난 실업을 감내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재정건전화 과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은 통화확장이다. 

93년 클린턴이 적자 축소를 발표했을때 역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린스펀과의 공조를 통해 확장적 통화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2010년 이후 영국도 보수당 정부가 급진적인 긴축을 펼치고 있지만 영란은행의 공격적인 확장정책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 

재정문제를 안고 있는 미국 상황을 생각해볼때 테이퍼링에 대한 논의는 너무 이른지도 모른다. 워싱턴에서 부채한도를 갖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지만 미국 정부의 적자 규모가 1년새 GDP대비 7%에서 4%로 줄었을만큼 상당한 수준의 긴축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준은 확장적인 통화정책의 지속을 지향해야 한다. 만약, 양적완화가 적합하지 않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더불어, 당장의 재정적자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정 건전성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회보장, 의료보험 관련된 정부지출은 베이비부머의 은퇴에 따라 그 부담이 급증하게 돼있다. 이런 미래의 공적 부조를 줄이는 것은 당장의 경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장기적인 재정건전성을 개선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 


LESSON #Final.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 

브래드 들롱(Brad DeLong)은 60년~70년대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막지 못한 것이, 그 이전 대공황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경기를 위축시키지 않으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지금 정책입안자들은 인플레이션 시대에서 성장했던 사람들이고, 우리는 너무 과도하게 인플레이션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나는 정책입안자들이 자산가격이 2006-07년의 고점 수준을 회복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지나친 우려를 표하는 것이 걱정스럽다. 확률이 낮은 버블발생 우려때문에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더딘 회복, 낮은 인플레이션, 기업들의 투자부진 등을 외면하게 될까 걱정이다. 직전에 일어난 과거에만 주목하지 말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긴 역사를 돌아보자. 더불어, 나는 새로오는 연준 의장을 비롯해서 통화정책의 관련된 정책입안자들이 현실적인 다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좀더 유연한 사고를 하길 바란다.





금융위기 극복과정에서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학문적인 논쟁은, 개인적으로 케인지언 학파의 완전한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생각한다. 

로머의 이번 강의 내용도 기존 케인지안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통화/재정 양면에서 확장적인 정책을 지속해 명목GDP를 일정 수준에 도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연연해서' 자산버블이나 인플레이션 따위를 걱정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적어도 미국에 국한해서만큼은, 이 주장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상 최고치를 넘어선 주식시시장이나 급격하게 오른 부동산 가격을 보면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이미 민간 부채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됐고 성장잠재력이 큰 미국 경제는 추가적인 확장정책을 수용할만한 기반을 갖춰다고 생각한다. 주식시장에서 일부 거품이 나타날 수 있겠지만 시장 내부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웍을 바탕으로 시선을 돌려 한국을 볼 때, 우리가 처한 현실은 매우 심각하다. 

양극화, 고령화, 부동산 디플레이션, 높은 부채부담, 수출산업의 성숙단계 진입 등으로 경제전반의 디플레 압력이 높고 수년째 0%대의 저성장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경제의 현실이다. 언론에 노상 오르내리는 한국 가계부채 문제의 핵심은 부채의 절대 규모가 아니라, 부채부담이 소득수준이 낮은 취약계층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비위축으로 연결되고 결과적으로 이미 존재해 있는 디플레 압력을 더욱 심화시킨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한국은 미국보다 오히려 더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재정/통화 정책이 필요한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나 정책 대응은 벌써 몇년째 거꾸로만 가고 있다.

최근 (특히 보수정파에서) 상황에 맞지 않는 균형재정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정부가 이에 동조하여 증세를 담론화하고 재정지출 축소의 불가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진정으로 잠재성장률 수준의 경기 부양을 원하고, 금융위기 이후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세계경제의 흐름에서 뒤쳐지고 싶지 않다면 현 시점에서 (로머가 표현하듯) "패러다임 전환" 수준의 통화정책과 단기적인 재정적자 감수가 불가피하다. 

이 와중에 증세 운운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안그래도 부채부담이 큰 중산층 이하 계층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부가세/간접세를 인상하자는 아이디어가 정부 측에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정책적 문제점을 제대로 꼬집지 못하고 허송세월하고 있는 야당의 무능함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추가 금리 인하와 적극적 시장개입도 불사하겠다는 과감한 중앙은행과 돈을 풀고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생활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정책조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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