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Milestone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다음과 같은 지향을 지속해왔다.  

  • 과도한 부채로 인한 리세션을 방지하기 위해 대량의 유동성을 공급한다. 유동성 공급은 금리를 낮춰 부채부담을 경감시키고, 자산가격의 하락을 막아 부채상환을 가능케 한다. 

  • 리세션이 방지된 이후에도 과잉공급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리세션 리스크 뿐만 아니라 디플레이션 리스크  역시 해소될 때까지 유동성 공급을 지속한다. 

  • 유동성 공급을 통해 금리를 더 낮추고 자산가격 상승을 더 지속하면, 가계는 저축을 줄여 소비를 늘리고 기업은 투자를 확대해 총수요가 증가하면서 과잉공급 문제가 해결되고, 결국 경제가 선순환 구조로 회귀할 수 있다. 

미국을 필두로, 이러한 방식은 지난 6년간 어느정도 잘 동작해왔다. 하지만, 2014년들어 이러한 경제체제는 몇 가지 문제에 직면했고, 하반기들어 그러한 문제들이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서서히 부각되고 있는 듯 하다. 직면한 문제라는 것들 중에 중요한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양극화로 인해 자산소유구조가 심각하게 편향돼 있다. 이로 인해 자산가격 상승은 (주로 주택렌트비와 같은 비소비지출 확대의 경로로) 다수의 자산비소유 계층의 소비증가를 억제하였다. 그동안 자산소유계층의 소비증가가 자산비소유계층의 소득증가로 연결되어 사회전반의 총수요 증가를 일으킬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2014년 들어 전체적인 경제성장률 상승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인 가계소득과 소비가 답보하면서 자산가격상승의 자산비소유계층 소비억제라는 부작용이 예상보다 클 수 있다는 우려가 확대되고 있다.  

  • 과잉공급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의 투자는 생산설비확대 보다는 자사주매입과 같은 재무적 구조조정이나, M&A등 가계의 소득증가를 유발하지 않는 투자방식에 집중되었다. 과잉공급 문제가 덜한 IT서비스 업종의 신규 창업과 투자가 크게 확대되었으나, 이 업종의 고용유발효과가 상대적으로 적고 오히려 기존산업을 해체하여 사회전체의 고용을 감소시키는 부작용마저 있어 전반적인 기업 투자의 경제발전 유발효과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 결과적으로 통화팽창에 의한 가계소비/기업투자 증가는 원래 계획된 것보다 그 효과가 적었다. 그러나 더디게 진행되는 실물경제 회복과는 달리 유동성공급과 리스크감소의 이중효과로 금융시장의 반응은 훨씬 빨랐고 결과적으로 채권/크레딧/주식/파생상품 등 거의 모든 금융상품의 벨류에이션이 역사적 최고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통화팽창에 따른 실물경제진작과 금융시장반응 간의 속도차이 문제는 금융상품의 변동성 리스크를 확대시키고 있다. 

올해 여름까지 위의 문제들은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과소평가 되거나 무시되어 왔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증세와 재정확대는 당장의 경제회복 모멘텀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논의 자체가 기피되었고 경제발전의 혜택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전반에 확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다가 홍콩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홍콩 '우산혁명'에 대해서는 민주화라는 정치적 요구보다는 양극화라는 경제적 배경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이 블로그의 생각이다. 홍콩은 자본이동이 자유롭고 세율이 낮으면서 통화가 달러에 페그돼 있어 글로벌 통화팽창에 가장 민감한 영향을 받는 공간이다. 더불어, 도시국가 형태로서 광범위한 고용과 소득을 창출시킬 수 있는 생산기반이 부족해 통화팽창에 따른 자산가격 상승과 다수 거주민의 실질 소득 감소의 상충이 전세계에서 가장 첨예한 국가다. 홍콩에서 공무원이나 금융업종 종사자가 아니라면 임금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는 전세계 다른 지역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홍콩에서 거주하기 위한 렌트비 등 생활물가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다. 결과적으로 홍콩에 거주하는 다수의 삶은 시간이 갈수록 불행해지고 그것이 민주화 요구로 촉발되었다. 이제까지 경시되고 방치되어온 '양극화로 인한 통화팽창의 소비진작효과 부재' 문제가 현실적으로 대두된 것이 홍콩 사태의 본질이며, 이것은 중국 본토나 세계 다른 지역으로 확대될 리스크를 내재하고 있다. 


공급과잉의 상존과 실물경제를 자극하지 못하는 기업투자의 편중 문제는 올해 끝도 없이 하락하는 원자재상품가격으로 상징된다. 통화팽창이 커머더티 인플레이션을 촉발시켜온 수백년간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올해 지속적인 커머더니 가격하락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현상이다. 커머더티 가격 하락은 선진국 소비자들에게는 에너지 비용 등을 감소시켜 소비여력을 늘려준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가격하락은 커더머티 수출 의존도가 높은 중남미, 중동, 러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부정적이다.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국가 디폴트에 직면했고, 브라질의 정치가 혼란해졌으며, 중동에서는 엽기적인 IS사태가 발생했고,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 분쟁이 발생했다. 아직까지 이 모든 현상들은 국지적인 정치불안으로 치부되고 있으나, 기업투자의 편중이 해소되지 않으면 이러한 '국지적 문제'는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해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지속적인 커더더티 가격 하락은 북미와 유럽의 디플레이션 리스크를 확대해 통화팽창의 효과를 반감시킴은 물론, 향후 정책적 대응 여지를 축소시키는 직접적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시장은 높은 벨류에이션 부담과 위에서 언급한 "(지금까지는) 국지적이고 부차적인" 리스크 부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변동성이 더욱더 축소되고 오직 한 방향으로 오르기만 하는 국면에 있었다. 하지만, 높은 가격은 그만큼 높은 변동성 리스크를 수반한다는 근본적인 관계를 금융시장이 그동안 지나치게 무시해왔다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동반된 9월 하순이후 가파른 가격조정으로 입증되었다. 금융위기 이후 지난 6년간 금융상품의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 어떤 실물경제 지표도 아닌, '중앙은행의 통화량 증가속도'였다. 글로벌 통화량 증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미국 연준의 자산 총액과 선진국 주가지수를 비교한 아래 차트를 보면 그러한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 통화팽창을 주도한 G4(미국, 유럽, 영국, 일본) 중앙은행 중, 미국은 QE3가 가을부로 사실상 종료되었으며, 일본의 중앙은행 자산증가속도 역시 2014년들어 둔화되고 있으며, 유럽과 영국은 이런저런 이슈에도 불구하고 자산증가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또다른 한 축인 중국은 부동산경기둔화로 8월 M2증가율이 10년래 최저치에 근접하는 등 역시 통화팽창 속도가 둔화되고 있다. 9월 하순 이후 글로벌 증시 조정은 통화팽창이 지속되지 않는 국면에서 금융시장에 내재된 변동성 리스크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G4 중앙은행 자산의 전년대비 증가율 추이-



미국 연준의 QE3가 종료되고 나면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가장 강력한 추동요인이 소멸된다. 이 빈자리를 유럽/일본/중국의 중앙은행들이 대신하거나, 미국이 새로 QE4에 나서기에는 올해 대두된 새로운 현상과 문제들로 인해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 통화팽창이 마무리 되고, 통화팽창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통화팽창을 지속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는 올해 가을은 6년간 지속되어온 역사의 한 챕터가 마무리되는 국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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