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사정

#1. 미스터 마켓(Mr. Market)

미스터 마켓은 오래전 벤저민 그레이엄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조울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기분이 상했던 적이 있다. 스스로도 기분이 쉽게 오락가락하는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평가를 들을 줄이야. "내가 어딜 봐서 조울증에 걸린 정신병자란 말인가! 이 정도 감정기복은 누구가 있는 현상 아닌가?"  

하지만, 요즘들어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기분에 빠지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특히 이번 연말연초가 심했다. 지난 가을 이후 미스터 마켓의 심리상태는 심각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일들이 좀 있긴 했었지만 그렇게까지 우울할 일은 아니었는데 웬일인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깊은 우울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최악의 연말을 보낸 뒤 해가 바뀌자 갑자기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퉁명스럽기만 하던 옆집의 제롬 파웰씨로부터 지나가는 길에 칭찬을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세상이 행복해진 건 아니었는데, 온 갑자기 주변이 장미빛으로 보였다. 침울하기만 했던 컨디션이 회복된건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기분이 오락가락하다니 정말 자신이 조울증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봄이 봄 같지 않은 미스터 마켓이었다. 



#2. 미세스 이코노미(Mrs. Economy)

미스터 마켓의 아내인 미세스 이코노미는 젊은 시절 늘 내일에 대한 밝은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미스터 마켓과 결혼한 이후 수시로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남편의 변덕에 결혼생활이 수월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늘 가슴속에 품고 있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그 위기들을 슬기롭게 이겨내곤 했다. 

하지만 그건 10년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였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그 사건에 오랫동안 지탱해온 그녀의 열정과 체력은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한순간에 모든 미래가 잿빛처럼 우울해지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굳건한 의지를 지켜오던 그녀는 그 사건 이후 약물에 의존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밝고 건강했던 사람이 약물중독자가 되다니. 미세스 마켓은 처음에는 자신이 맞은 주사가 약물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리쿼디티(Liquidity)라는 이 평범한 주사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몸이 힘들때 한두번 정도는 맞아본 것 아닌가? 사건 이후 몸상태가 너무 안좋았기 때문에 양을 좀 늘렸을 뿐인데, 이게 중독으로 이어질지는 몰랐다. 지난 10년동안 그녀는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세번의 고통스러운 인내의 시간을 보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자신은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한 아름다운 존재라고 다짐하고 되뇌여보지만 어느새 또다시 리쿼디티를 찾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할 뿐이었다. 



#3. 미스 컴퍼니(Miss Company)

미스터 마켓은 오래전부터 아내 몰래 자신의 비서인 미스 컴퍼니를 만나고 있었다. 미스 컴퍼니는 어딜가든 눈에 띄는 화려한 여인이었다. 약물에 빠진 미세스 이코노미의 히스테리에 진저리가 난 미스터 마켓은 미스 컴퍼니의 아름다움에서 위안을 받곤 했다. 

미스 컴퍼니는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자존감이 낮은 여성이었다. 어딜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지만,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받기 전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까 늘 불안했다. 그 불안은 과시적인 소비와 자기파괴적인 미스터 마켓과의 불장난 같은 관계로 이어졌다. 화려한 삶을 살고 있지만 도대체 자신이 왜 존재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지 모르고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공허함에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점점 나빠지는 정서상태(펀더멘탈)와 그럴수록 피상적인 일들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에 괴로웠을 때 모임에서 만난 미스터 액티비스트로부터 '주주환원'이라는 심리상담센터를 소개받았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불안감이 너무나 커져서 그런 곳에서 정체성을 되찾지는 못할 것이라는 걸 그녀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4. 엉클 거번먼트(Uncle Government)

미스 컴퍼니는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옛 애인이었던 엉클 거번먼트와의 애매한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거번먼트는 한 때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내던지고 차가운 말들을 뱉어낸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관계가 끝나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거번먼트는 가끔씩 뜻을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과거 거번먼트는 대의를 꿈꾸는 야망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언제든 앞장섰고 주변사람들을 이끌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엉클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미스 컴퍼니를 사랑했지만 자신이 꿈꾸는 대의를 생각하면 그 사랑은 하찮은 것이었다. 거번먼트는 미스 컴퍼니와 미스터 마켓의 관계, 그리고 미스터 마켓이 미세스 이코노미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 역시 자신의 사랑만큼이나 대의 앞에서는 보잘것 없었다. 그 세 사람이 왜 그런 바보같고 소모적인 감정에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어진 미스 컴퍼니에게 가끔씩 연락하는 건 불쌍한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미스 컴퍼니의 질척거림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리들 바보같은가. 그러나, 거번먼트도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불안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엉클이라고 불러주는 사람들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일, 엉클 거번먼트가 아닌 그냥 거번먼트로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5. 스누피(Snoopy)

스누피는 미스터 마켓이 키우고 있는 강아지의 이름이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스누피는 사실 생각할 줄 아는 강아지다. 사람들이 자기를 스누피라고 부르지만 자기는 엄연히 저 먼 앵글로색슨 땅에서부터 이어진 인베스터(Investor) 혈통의 순종임을 한 번도 잊지 않고 있다. 스누피는 이코노미, 마켓, 컴퍼니, 거번먼트 네 사람을 바라보며 인간들이 강아지만도 못하게 바보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미스터 마켓이 불쌍한 미세스 이코노미를 조금만 더 이해하고 조금만 더 희생적인 자세로 미세스 이코노미를 돌봐준다면, 미세스 이코노미는 아마 약물중독에서 벗어나 과거의 열정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미세스 이코노미가 미스터 마켓과 미스 컴퍼니의 관계를 모른 척 하는 것도 스누피가 보기엔 바보 같았다. 남자라는 족속은 원래 여성의 아름다움에 쉽게 마음을 뺏기지 않던가. 이코노미 부인이 마켓씨에 대한 일방적인 원망에서 벗어나서 조금더 자기관리에 힘쓴다면 마켓씨의 예전의 사랑을 되찾아올수도 있지 않겠는가. 미스 컴퍼니는 스누피의 눈에는 가장 바보같은 존재였다. 미스터 마켓과의 관계나 엉클 거번먼트에 대한 집착은 그녀를 불행하게 할 뿐이었다. 그녀는 모든 관계를 끊고 정말 자신이 원하고 잘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화려한 겉치장이나 지금의 직장같은건 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면 불쌍한 그녀도 정체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 스누피가 보기에 엉클 거번먼트는 자신을 엉클로 만들어준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대의에 대한 집착이 사람들에게 무시와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스누피는 이런 간단한 해결책을 왜 사람들이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시 옛 인베스터 가문의 시조가 예언했듯이 먼 미래에는 이런 불완전한 인간들은 사라지고 강아지들만 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하는 강아지 스누피는 정작 사람들이 자신을 왜 스누피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약물에 빠진 이코노미 부인 대신 자신에게 사료를 주는건 미스터 마켓이었고, 그 사료를 마켓씨에게 사다주는 건 그의 비서인 미스 컴퍼니였다. 그리고 스누피가 새끼 강아지였을때 마켓씨에게 스누피를 분양해준 건 엉클 거번먼트였다. 집에 처음 들어온 새끼 강아지가 불안에 떨며 좌우로 쉴새 없이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 미스터 마켓씨는 말했었다. "이 녀석 엄청 기웃거리네. 여보 기웃거리다가 영어로 뭐였지? 아 스눕(snoop)! 이 놈, 이제 니 이름은 스누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