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신학대 단체들이 모여 발표한 신학생 시국연석회의 시국선언문이라는 글을 보았다. 이 선언문은 구약성경 레위기 18장21절 "너는 네 자식들을 몰렉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면 안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몰렉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지역에 들어왔을 때 그 지역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셈족 사이에 믿어지던 신의 이름인데, 몰렉을 위한 제사에서는 유아를 산 채로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인신공양이 벌어졌다고 한다. 생명의 가치에 대한 기본적 믿음조차 없는 말세의 사교를 경계하는 성경구절은 시국선언의 도입으로 적절한듯 하다. 이후 펼쳐지는 선언문의 문장은 너무나도 정치하고 정연하다. 특히, "그러나 여기에 정말 분노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듯하다. 특검이니 탄핵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최순실이라는 귀신만 제거하면 박근혜라는 여종이 다시 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체제 자체에 귀신이 들려 있다는 사실 말이다." 라는 문장에서 탄식하게 된다. 최순실이 나쁜가, 최순실에 끌려다니는 박근혜 대통령이 나쁜가, 이런 사정을 다 알고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상품화한 집권세력이 나쁜가, 이런 집권세력에 편승하거나 굴종한 이 사회의 대다수가 나쁜가, 우리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그간의 역사적 과정과 체제가 나쁜 것인가. 우리의 문제의식은 거의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이 신학생 시국선언문에 대해, "가장 좋은 연대방식이란 각자의 전문분야를 살려냄으로써 모두가 공동의 과제에 대처하는 모습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신학생 시국선언문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다."라는 어떤 분의 평을 보았다. 나는 저 선언문처럼 간명하고 의미 깊은 문장을 쓰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사건을 단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는 괴인물에 대한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이 없는 한국식 사회체제의 한계를 생각해보자는 포스팅으로, 미약하나마 연대의 의무를 나눠보려 한다. 


 2012년 12월의 18대 대선. 그보다 3개월전에 번역서로 출간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이 있다. 




 MIT 경제학 교수와 하버드 정치학 교수가 함께 쓴 이 책에선, 세상만사를 죄다 다뤄야 할 것 같은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매우 단순한 논리로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관통한다. 어떤 국가의 지속적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그 국가가 소수의 부를 위한 착취적 경제체제를 갖고 있느냐, 아니면 보장된 경제적 자유와 조화로운 경쟁 속에 창의성을 살려낼 수 있는 포용적 경제체제를 갖고 있느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국가가 착취적 경제체제를 갖는지 아니면 포용적 경제체제를 갖는지는 인종이나 민족, 문화, 지리적 특성과 무관하게 어떤 정치체제를 가졌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로 지루하게 증명해 나가는 것이 이 책의 전부이다. 10쇄를 넘어설 정도로 국내에서 인기있고 세계적으로 호평받는 이 책에 대해 '지루하다'라고 평한 것은 정말로 책이 재미가 없어서는 아니다. 사례로 반복되어 증명되는 논제가 너무나도 분명해서이다. 책을 1/4 정도만 읽어도 핵심 논제에 아무런 이견도 제시할 수 없게 된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정치적 과정을 거쳐서 확립되는 민주적 정치질서만이 자유롭고 포용적인 경제체제의 존립을 보장할 수 있고, 이런 체제 하에서 지속가능한 사회의 번영이 가능하다." 이 문장에 그 어떤 반박이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이 책의 논제와는 달리,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정서는 좀 다른 것 같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독재체제'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선 포악한 독재자의 딸이 대선 후보로 나와 아무리 함량미달의 상식 밖 모습을 보여도 유권자들은 그 딸이 '경제를 모르는 빨갱이들'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표를 던졌다. 


 그래서 이 책의 제5장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한국인에게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수평적 정치제제-포용적 경제체제만이 번영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저자들은, 5장에서 독재정치-착취경제 하에서도 경제적 고성장을 이뤄낸 역사적 사실들을 다룬다. 바로 박정희 정권 하의 한국경제 같은 사례들이다. 대표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1920년대-1960년대 소련의 사례이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당 독재체제를 수립한 소련은 스탈린 치하의 참혹한 공포정치 속에서도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구가했다. 이런 고성장은 영원한 듯 보였고 1970년대까지 미국의 경제학자들조차도 경제성장의 속도에서는 소련이 미국보다 더 빠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착취적 제도하의 빠른 경제 성장에 대해 저자들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비판한다. 착취적 체제 하에서 경제성장은 특정 분야에 사회의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면서 이뤄진다. 유럽인들의 신대륙 개척 이후 지금의 아이티 지역은 사탕수수 농장에 대량의 노예 노동력을 투입하면서 고성장했다. 혁명 직후 전근대적 농업국가였던 소련은 농민 수천만명을 기아 상태로 내몰고 국가 자원을 공업화에 집중시키며 성장했다. 60-80년대 한국도 독재정권이 공업화의 속도를 높이면서 기적적인 성장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집중적 자원투입으로 인한 성장은 기술과 자원배분에 있어서 완전히 낙후된 초기 개발 단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17세기 서구의 참략자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한 중남미의 마야 문명은 그 이전의 천년 가까운 세원동안 신석기 시대 수준의 문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체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기 1세기에서 9세기 사이 마야문명에는 나름의 고성장기가 있었다. 부족국가 수준이었던 마야 지역의 경제체제가 단일 권역으로 통합되면서 성장했으나 곧 수탈적 경제체제의 근원적 한계가 드러나며 9세기 이후 성장을 멈췄다는 것이다. 


"착취적 제도하에서 달성한 성장은 포용적 제도하에서 창출된 성장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 성격상 착취적 제도는 창조적 파괴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기술적 진보 역시 기껏해야 제한적인 수준에 그친다. (중략) 구소련은 서방의 일부 진보한 기술을 급속도로 따라잡고 대단히 비효율적이었던 농업 부문에서 공업으로 자원을 배분하면서 고속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농업에서 공업에 이르기까지 전 부문에서 인센티브가 미흡했기 때문에 기술적 발전을 자극할 수 없었다. (중략)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이 극심한 제한을 받는 것은 혁신의 결여 때문만은 아니다. (중략) 내부 분쟁과 불안정은 착취적 제도에 반드시 수반되는 태생적 특징이며, 비효율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을 와해시키기 일쑤이며 심하면 법과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려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pp 220-221)


 목표가 분명하고, 그곳에 빨리 도달해야 하는 것만이 목적일 때에는 리더의 말에 집단이 순종하고 모든 역량을 목적을 위해 모으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폐허 속에서 국가가 처음 생겨났을때, 선진국의 발전 궤적을 따라가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을 때 그럴 때엔 독재가 경제 성장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마야 문명의 초기가 그랬고, 볼셰비키 혁명 직후의 소련이 그랬고, 한국이 그랬다. 그러나 경제성장 초기 시행되었던 개발독재의 효과가 오래 지속될 순 없다. 특히, 목표가 불분명하고 속도보다는 방향의 재정립이 중요해지는 변화의 순간에선 리더의 역할보다는 수평적 조직구성이 중요해진다. 군대는 전투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조직 형태이다. 그러나 군대 조직이 모든 사회 문제에 있어서 효율적이진 않다. 때론 출퇴근이 자유롭고 신입사원이 오너의 이름을 부르는 실리콘벨리 조직문화가 가장 효율적이라며 칭송받을 때도 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은 군대식의 조직이 아니라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조직이 더 효율적인 시대이다. '박정희 시대'의 재림을 원하지 않는 것은 독재치하의 인권탄압과 민주사회에 대한 당위성 때문만이 아니다. 박정희 시대를 추억하는 세대들이 그토록 원하는 바로 그 경제성장을 위해서 이 사회는 더 이상 구시대적 국민동원과 개발독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더이상 폐허 속에 이제막 고개를 든 추격경제가 아니다. 따라하는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모두 소진했고 한국의 기업과 경제인들은 선진국의 경쟁상대와 비슷한 출발선에서 서서 명운을 겨루고 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정부주도의 자금지원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을 모색하기 위한 창의성과 유연함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이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신호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국가/사회/체제같은 정치담론이 아닌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과 현대에 대한 것이다. 



 위의 그림은 현대차의 주가와 종합주가지수를 비교한 것이다. 도표상에 표시된 2014년 9월 19일은 현대차 그룹이 삼성동 한전부지를 10조원에 낙찰받는 다음날이다. 한전부지 낙찰 이전까지 종합주가지수와 함께 일정 범위 안에 횡보하던 현대차 주가는 낙찰 직후 급락하여 그 이후 2년이 넘게 흘렀음에도 회복되지 못하고 40% 가까이 하락해 있다. 2014년 9월 19일에 썼던 블로그 포스팅에서 나는 시세에 두배 이상의 웃돈을 준 현대차그룹의 선택이, 재벌이라고 부르는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에서만 가능한 일이며 그런 지배구조가 단순히 투자자들을 걱정케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기업경영의 리스크로 연결될까 두렵다고 썼다. 2년이 지금을 보면 그 때의 우려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다. 


 전기차는 환경적으로 우수하지만 대규모의 충천인프라를 구축하지 않고서는 대중화되기 어렵다. 충전인프라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최소화하면서 전기차 보급을 확대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카쉐어링이 있다. 집집마다 차를 갖고 있는 상황에선 집집마다 전기차 충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필요할 때만 차를 빌려쓰는 문화가 일반화된다면 충전기를 카쉐어링 업체에만 집중시켜도 된다. 그런데 카쉐어링에도 문제가 있다. 빌린 곳과 돌려주는 곳이 같은 카쉐어링은 렌터카와 다를바가 없다. 편도로 차를 빌리고 난 뒤에는 쉼없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야만 카쉐어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럴려면 운전자없이 다음 목적지로 차가 이동하는 자율주행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전기차-카쉐어링-자율주행은 사실상 동의어이고, 미래 자동차 이용 문화가 바뀌는 방향을 의미한다. 테슬라와 우버가 함께 자율주행 기술을 선도하고, 포드가 카쉐어링 업체를 인수하는 것은 단순히 사업확장의 의미가 아니다. 불과 수년내로 차는 더 이상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월 이용료를 내고 서비스로 받는 개념이 될 것이고, 거리의 차량들은 운전자 없이 다음 서비스 제공자를 찾으러 끝없이 돌아다닐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SF영화같은 이야기라고 했던 일들을 선도 기업들은 벌써 모두 현실화시키고 있다. 이런 자동차 이용의 패러다임 변화에 가장 위태로운 글로벌 자동차 업체는 불행히도 현대차다. 자동차가 소유가 아닌 서비스의 대상이 되어도, 럭셔리 카 시장은 살아남을 수 있다. 자동차를 자신의 계급적 상징물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오래 존재할테니 한달에 1-2만원만 내면 한달 내내 출퇴근할 수 있는 서비스가 나와도 페라리나 포르쉐는 팔릴 것이다. 하지만 대중차 시장은 급격히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는 아직까지 대중차 업체이다. 대중차 업체가 살아남으려면 기술변화에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 그러나 장거리 주행이 가능한 전기차를 값싸게 만드는 것도 쉬운 기술은 아닌데 이 차량을 자율주행시키는 것은 빅데이터/딥러닝/클라우드 등 최첨단의 소프트웨어/하드웨어 기술이 모두 집약되는 초고난도의 영역이다. 현대는 이런 최첨단 기술 도입에 투자해야할 소중한 10조원을 2년전에 토지대금으로 지불했다. 


 주가가 왜 저 모양일까. 왜 실적이 감소할까.  한국의 언론과 정치권은 주로 강성노조를 현대차의 발목을 잡는 주요 원인으로 언급한다. 값싼 대중차를 효율적으로 대량생산하는 것이 여전히 자동차 회사 경쟁력의 원천이라면 강성노조를 비난하는 것이 일면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경제성장 초기에 독재체제가 효율적일 수도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당 몇대의 차를 만드는지가 자동차 회사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단순화된 전기차의 구조는 수십년간 누적된 자동차 공장의 효율성을 가볍게 무시해버릴 것이다. 반면 19개의 카메라로 찍어대는 HD영상 데이터를 리얼타임으로 분석해 네비게이션 지도에 없는 도로에서도 핸들과 브레이크를 제 맘대로 조작하는 기술에서는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현대차의 미래와 주가의 전망은 어떨지 알 수 없다. 기적처럼 부활하여 다시 자동차 업계를 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시대가 바뀌고 변화에 대한 빠른 적응이 필요할 때 현대차는 퇴행적 선택에 크게 베팅했고 그 기저에는 한국 경제의 눈부신 성장 원동력으로 독재정부와 함께 거론되는 재벌 지배구조 체제가 있다. 


 지난 2년간 삼성전자는 잘 나갔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의 지배적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고, 스마트폰 시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굳건히 리더의 자리를 지켰으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있어서 선행 기술을 독점했다. 그러던 와중에 배터리 게이트가 터졌다. 노트7 발화가 9월에 최초로 문제됐을 때 삼성전자는 발매 한달 만에 전량 리콜과 배터리 공급선 교체를 단행했다. 하지만 교체된 배터리 조차 내부 발열을 견디지 못하면서 10월에 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만약, 9월 리콜 때, 그 때 아예 단종을 했더라면 지금의 브랜드 이미지 타격과 장기적인 주력제품 공백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양대 부품에서의 압도적 경쟁력, 전세계 구석구석 뻗어있는 영업망과 브랜드인지도를 감안했을 때 노트7 단종이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업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이 되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전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발화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9월에 단기적인 실적 악화를 우려한 경영진이 리콜과 판매강행이라는 무리수를 비합리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다. 삼성그룹의 총수 자리를 물려받은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주 이사회에서 등기이사로 선임되면서 실질적인 대관식을 치뤘다. 그룹 지배구조가 본격 승계 작업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앞으로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는 실무 경영진은 실적에 쫓겨 얼마든지 무리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는 최근 급속한 합종연횡과 재편과정에 있다. 퀄컴이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의 1등 업체인 NXP를 50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업계 역사상 최고액수로 인수했다. 그 전에 소프트뱅크가 전세계 모바일AP의 표준을 갖고 있는 영국 ARM을 35조원에 인수했고, 와이파이 블루투스 같은 통신칩의 강자인 브로드컴은 아바고테크놀로지스에 41조원에 팔렸다.  AI와 IoT, 차량전장화 등의 영향으로 반도체 산업은 격변기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 내세우는 것은 앞선 미세화 공정과 3D반도체인데, 이는 모두 생산원가를 절감하는 기술이지 패러다임을 바꾸는 기술은 아니다. 소프트뱅크가 ARM을 인수하고 100조짜리 펀드를 만들어 IoT시장을 지배하겠다거나, 퀄컴이 NXP를 통해 전기차 시장에서도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갖겠다거나, 인텔-마이크론이 연합하며 디램과 플래시메모리의 경계를 지우겠다거나 하는 패러다임 쉬프트의 비젼은 삼성에선 잘 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 언급된 회사들의 인수합병 딜에서 삼성전자는 늘 빠지지 않고 인수후보로 언급됐다는 것이다. 3분기말로 삼성전자는 70조원이 넘는 순현금을 갖고 있다. 현금이 이렇게 많으니 외국 펀드가 배당을 늘려라 회사를 쪼개라 요구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현금에 소프트뱅크가 ARM을 인수할 때 쓴 것과 같은 재무적 기술을 조금만 발휘하면 ARM, 브로드컴, NXP를 전부다 인수할 수도 있었다.  ARM/브로드컴/NXP를 모두 사들였다면 삼성전자는 이미 스마트폰/자동치/통신인프라 거의 모든 면에서 그 어떤 업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압도적 위치를 점했을 것이고 굳이 외국 헤지펀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적정 시가총액이 지금의 두 배는 됐을 것이다. 늘 반도체 시장의 '초격차'를 이야기하는 삼성이 왜 이런 업계의 빅딜에선 단 한 번도 이름표를 내밀지 못하는 것일까. 


 노트7 단종 결정 직후 정치권에서는 '삼성전자에 내부 모순이 쌓인 것이 아닌가'라는 목소리를 냈다. 정치권 인사들이 노상 해대는 만시지탄의 비판일 뿐이지만, 비판의 내용 자체는 틀린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발화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상황에서 무리하에 제품 판매를 강행했다는 것과 세계 최대의 반도체 업체가 글로벌 M&A과정에서 단 한 번도 주역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겹쳐지며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오너의 지배구조 승계에만 온 여력을 집중하고, 그 사이에 중요한 기회들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폐허 속에 기적의 성장을 이룩한 한국이 나은 글로벌 기업, 삼성과 현대를 걱정하는 것은 쓸데 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착취적 지배구조 하에서 경제성장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것처럼, 시대가 바뀌어서 추격이 아닌 변화의 모색이 중요한 시점에서 재벌 중심의 기업지배구조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한 때 세계 최강이었던 한국 조선업이 순식간에 구조조정의 골칫거리가 된 것도 2010년 이후 시장 상황이 급변했음에도 수주잔고만 채우는데 골몰하는 과거 방식의 경영을 밀어붙인 탓이 크다. 서두에 언급한 신학생 시국 선언문에 나온 "이 체제 자체가 귀신이 들려있다"라는 표현은 아마도 이 지점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최순실은 범법자이고 근본 문제는 대통령에게 있다. 하지만 최순실을 처벌하고 대통령직을 어찌저찌 한다고 해도, 과거 독재정권의 비인간적 개발독재가 우리의 경제적 번영에 필요한 요소라는 낡은 믿음이 여전히 사회에 만연하고, 기본적인 역량과 소양조차 검증하지 못하는 정치체제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번 일은 국정공백으로 경제와 사회를 퇴행시킨 정치적 소동일 뿐, 전화위복이나 재기의 계기는 전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최순실의 비위만 파들어가고 대통령의 거취만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진짜 문제이고 무엇이고 이후에 어떤 체제를 모색해야 하는지로 우리의 관심을 확장해야할 것이다. 


 '무조건 1번'을 찍는 소위 '콘크리트 지지층'의 논리에는 '살기가 고달프니 성장을 우선하는 보수세력이 집권해야 한다'는 기저가 깔려 있다. 이 논리가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이런 지지층의 성향은 우리가 직면의 문제의 해결책이 과거의 방식 안에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해봤던 일, 겪었던 일, 당했던 일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거 우리가 봤던 국가와 기업의 고성장은 자원집중과 누군가의 희생이 효과가 있었던 초기 성장기에나 가능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필요한 건 안해봤던 일, 몰랐던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을 용기있게 선택하는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카리스마적 리더의 결단이 아니라, 개인이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이며, 창조적 파괴를 일상화하되 거기서 소외되는 이들을 감싸는 포용적인 사회이고,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투명한 논의로 최선을 찾고 부담은 나눠 갖는 민주적인 체체이다. 노트7 발화 사태에 대해서 언론 기사에 가장 많이 보이는 제목은 "이재용의 결단" 이었던 것 같다. 광화문 광장 앞에서 3만명이 운집한 촛불시위를 벌이는 시대에 기업을 얘기할 때는 여전히 개발독재 시대의 재벌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업을 개인 오너의 사유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일로 우리는 좀더 근원적이고 확장된 담론을 나눠야 한다. 익숙함을 쫓아 매번 퇴행적인 선택을 반복해온 사회를 이번 기회에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최순실과 그 관계된 이들을 벌 주는 일과 관계없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울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