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의 헬리콥터 머니와 다카하시 고레키요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가진 벤 버냉키 전 연준의장이 지난주 일본을 다녀갔다. 참의원 선거 압승 후 리더쉽을 확고히 한 일본의 아베 총리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개헌을 통해 "군대를 보유하는 보통국가"로의 전환을 주창하고 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공격적인 경기부양 정책의 확대를 제시하고 있다. 이번 버냉키의 일본 방문과 아베 수상 면담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아베의 새로운 부양정책을 본격 시행하기 앞서 국내 여론의 분위기를 잡아가기 위한 일본 내각의 연출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버냉키 전 의장의 방일 기간 동안 일본 경제정책에서 특별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방일 일정 중 혼다 에츠로와 버냉키 간의 회담에서 "영구채 발행"이 언급된 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일이다. 확장적 통화정책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할 수 있음을 신호하기 때문이다. 혼다 에츠로는 이번 버냉키의 방일과 아베 수상과의 면담을 직접적으로 중재한 인물이다. 따라서, 버냉키와 혼다 에츠로간의 대화는 사실상 이번 방일 일정의 메인테마이고, 그 내용이 바로 영구채 발행이라고 할 수 있다. 


 벤 버냉키 의장은 지난 4월 자신의 블로그에 "제로금리 시대에 중앙은행이 시행할 수 있는 3가지 정책"이라는 포스팅을 시리즈로 게재했다.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역할은 경기에 따라 기준금리를 조절하는 것인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들이 지속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다 보니 너나할 것 없이 기준금리가 "제로"에 도달했다. 이론적으로 금리는 0이하일 수 없으니 제로금리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더 이상 전통적인 통화정책을 쓸 수 없게 된다. 미국 연준이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금리를 올리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금리를 내릴 수 없는 이런 교착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 향후 발생할 경기침체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런 상황에서 버냉키가 제시한 대안은 1)마이너스 기준금리의 적용, 2)포워드 가이던스와 추가 양적완화를 통한 장기금리의 조작, 그리고 마지막으로 3)헬리콥터 머니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앞서서 디플레이션을 경험한 일본은 통화정책의 실험에 있어서도 최첨단에 있는데, 일본은 버냉키가 제시한 3가지 대안 중 이미 2가지를 시행하고 있다. 일본의 금리는 이미 마이너스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있고, 채권시장의 거래량 대부분을 중앙은행이 직접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적완화 규모의 확대까지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일본에게 남은 대안은 사실상 마지막 대안인 헬리콥터 머니 하나 뿐이고 이번 버냉키 방일 중 언급된 영구채 발행은 헬리콥터 머니의 실무적인 버젼이라고 할 수 있다. 


 헬리콥터 머니는 말그대로 하늘에서 돈을 뿌린다는 것인데, 금리를 내리고 채권가격을 조작해도 경제주체들이 소비를 확대하지 않을 경우 직접적으로 돈을 살포하여 소비여력을 늘려주는 정책을 의미한다. 이런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광범위한 소비자에게 지원금이 제공돼야하며 이 지원금에는 만기상환이나 이자가 없는 그야말로 '무상' 자금지원이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이런 지원을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은 정부 재정확대 뿐이다. 감세를 시행하고, 각종 지원금을 확대하고, 정부가 직접 사업을 벌여 고용과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이런 재정확대가 제한된 것은 일본/유럽 등 재정확대가 시급한 국가들의 국채 부채비율이 이미 매우 높은 수준이라 추가적인 재정적자의 확대가 국가 신용의 문제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영구채 발행은 이런 상황에 대한 솔루션이다. 정부가 만기가 없는 영구채권을 발행하고 이를 중앙은행이 직접 인수하는 것이 이번에 언급된 영구채 발행의 골자인데, 이렇게 되면 정부는 원금상환 부담없이 재정지출을 늘릴 수 있고 중앙은행이 낮은 가격에서 채권을 발행 즉시 사줄 것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결정되는 신용등급에 대한 부담도 없어지게 된다. 대신,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어떠한 형태로든 가계에 직접적 보조금을 준다는 측면에서 시장의 가격결정 기능을 원천적으로 무시하며, 그 파급효과를 측량하기 어려운 매우 급진적인 통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은 이러한 형태의 급진적 통화정책을 이미 시행해본 경험이 있다. 이 글의 제목에 나와있는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1913년부터 1936년까지 무려 23년간 일본의 대장상(우리나라로 치면 경제부총리)을 역임한, 2차대전 이전 일본의 경제체제를 디자인한 인물이다.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겠지만, 내가 이 사람의 이름을 굳이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직 1930년대 고레키요가 '국채 직매입'이라는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국채 직매입이라는 정책이 바로, 자본주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실제로 시행된' 헬리콥터 머니 통화정책이다. 

 

 1930년 전후 일본은 전세계 대공황과 운명을 함께해 극심한 불경기를 맞았다. 일본 내에서는 이 시기를 '쇼와 공황'이라 부르는데, 당시 총리이자 대장상이였던 고레키요는 공황 극복을 위해 일본 정부의 국채를 중앙은행이 직접 매입하게 함으로써 거의 무한대의 재정확대를 가능케하는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파격적인 정책을 수행한다. 이 정책은 당시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30년대 산업국가 중 일본이 가장 빠르게 공황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벤 버냉키는 연준 의장이 되기 훨씬 전인 2003년에 이미 연준 연설에서 고레키요의 국채 직매입을 언급하면서 '중앙은행 역사상 매우 성공적인 통화정책'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파격적인 정책이 성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과도한 재정확대는 30년대 일본의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고 군비확대로 연결돼 일본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화하게 되었다. 3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이런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고레키요는 군사비를 중심으로 재정지출을 통제하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다시 경기가 하강하고 무엇보다 위상이 강화된 군인들로부터 직접적인 반감을 사게 되면서, 끝내 고레키요 자신이 1936년 젊은 군인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암살당하게 된다. 이후 역사는 알다시피, 군인들에 의해 장악된 일본 정부에 대본영이 설치되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오점으로 연결된다. 벤 버냉키 이전까지 국채 직매입 정책은 전세계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되며,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재정확대를 지원하는 것은 금기시되어왔다. 1982년 발간된 일본은행의 정책백서에서도 고레키요의 국채직매입을 "중앙은행 100년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구채 발행은 발행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채권 직접 매입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30년대 국채 직매입과 완전히 같은 정책이다. 일본은 이 논란많은 정책을 실제로 시행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겹도록 봐온 양적완화 정책도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들이는 것이니, 헬리콥터 머니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적완화가 채권시장을 통해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고 헬리콥터 머니는 중앙은행이 시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채를 매입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양적완화는 재정확대지원이 아니라 국채의 시장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전반적인 자산가격을 부양하고 경제주체들의 투자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양적완화는  궁극적으로 시한부이거나 장기화되면 실패할수 밖에 없는데, ㄱ)금융시장을 통한 자산가격 조작이 필연적으로 양극화로 연결되고, ㄴ)이로 인해 자산가격 상승이 자산비소유 계층인 근로자들의 생활비 부담으로 연결되어 소비의 구축효과가 발생하고 , ㄷ)높은 자산가격이 금융시장의 내재적 불안정성을 확대하고 ㄹ)구조조정을 지연하여 과잉공급을 만성화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베노믹스로 양적완화의 화끈한 효과를 경험했지만 정책시행 3년차에도 여전히 디플레이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양적완화의 긍정적인 측면은 물론 그 한계와 부작용까지도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어떻게든 대안을 제시해야 하고, 이번 참의원 선거로 아베는 미지의 대안에 대한 구체적 추진력을 얻었다. 


 여기서부터는 사적인 상상이다. 아베 정권은 중앙은행 채권 직매입을 통한 재정 확대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일본이 이 정책에 발을 들이게 되면, 궁극적으로 이런 유사한 재정확대 시도가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0년전만해도 들어본 적도 없던 양적완화가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된 통화정책이 된 것처럼 말이다. 트럼프, 브렉시트, 프랑스 테러, 터키 쿠데타 등 저성장 장기화와 양적완화 부작용으로 인한 사회의 긴장은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며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이러한 긴장과 구체화되는 갈등의 해결을 요구받는 정치세력들에게 발권력을 동원한 재정확장은 보호무역과 고립주의 다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테마이다. 


 브렉시트로 동반 폭락했던 글로벌 금융시장의 혼란은 이틀도 채 안가 수습되고, 이제는 상당수의 자산가격이 오히려 브렉시트 이전 수준보다도 훨씬 더 많이 올라가 있다. 금융시장이 빠른 회복을 넘어 더 가파른 상승세를 구가하고 있는 이유는 브렉시트가 계기가 돼 미국의 금리인상이 물건너 감은 물론, 이전보다 더 확대된 경기부양책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러한 시장의 기대감을 배신할 수 없다. 배신은 시장의 혼란과 침체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기존 정책을 답습하는 것만으로는 시장의 기대감을 오래 끌고 갈수도 없다. 배신의 의도는 전혀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장은 웬지 모를 기분 나쁜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의 모든 국가의 정책 초점은 '파격적인 재정확장'으로 기울어 갈 수 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헬리콥터 머니는 궁극의 정책대안일까? 그렇지 않다. 양적완화가 그랬듯이 헬리콥터 머니 역시 시행되는 중에만 효과를 발휘하는 임시방편이지 장기적인 경제체력을 회복시키는 궁극의 대안은 아니다. 1930년대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자기가 시행한 정책의 출구전략을 모색하다가 암살당했다. 헬리콥터 머니를 일단 시행하고나면 그 이후 정책을 축소하거나 중단할 때 엄청난 충격을 실물과 금융 양면에 주게된다.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 체력이 회복되길 기대하는 것이 정책 시행의 근거이고 희망이지만, 그 불확실성은 가늠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세계는 또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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